home

이수지

누군가와 이야기 할 때, 어떤 말을 하는지 보다 어떻게 말을 하는지에 더 관심이 가는 편이다. 어떤 말투와 제스처로, 어떠한 단어를 주로 쓰는지 들으며,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상상한다. 드라마는 마지막 회가 가장 재미가 없다고 느끼며, 길을 걷다 마주치는 어르신들의 역사가 궁금하다. 현재 눈앞의 무엇보다 그것이 무엇이 되기까지의 과정이 조금 더 재미있다.

네덜란드에서 전에 본적 없던 주변 작가들의 기이한 작업 방식은 과정이 그 자체로도 의미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비단 눈에 보이는 인상적인 방법론 뿐만이 아니다. 과정은 언제나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순간보다 실패와 번민의 시간이 대부분이고, 또 그런 시간을 거쳤을 때 결과물의 두께가 두꺼워 질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러한 물리적인 방법론과 내부적인 치열함이 결과물로 완성되어 전시장에 존재 할 때, 과정은 오히려 관념적으로 납작해지는 때가 있다. 과정 속에는 수많은 방향성을 가진 순간들이 있고, 나아갔지만 되돌아 오는 경우, 혹은 머무르거나 빠르게 지나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결과물이 완성되는 순간, 그 모든 공간적인 경험은 무게와 길이를 잃어 버린 채 선형적인 시간성 위에서 완결을 위한 당연한 순리가 되어진다. 나는 과정이 조금 더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과정을 드러내는 것이 이미 그 자체로 완결된 강력한 무언가로 느껴질 수 없을까 고민하게 되었다.


형식의 개인화

나는 창작의 과정에 집중하여, 형식이 곧 내용이 되는 결과물에 관심을 두고 있다. 작업 내용의 대부분은 개인의 도구와 과정을 짓는 데 비중을 두고, 그것이 결과물과 비등한 시각효과를 내는 데에 집중하고 있다.

도구
도구는 나의 형식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래픽 디자이너로 활동할 당시, 컴퓨터를 나의 도구로 인지한 적은 없었다. 리처드 세넷은 장인에게 도구란 오랜 시간 길을 들여 천천히 변형되어 ‘제3의 팔’ 이 된다고 말한다. 나는 내가 속속들이 이해하고 있고, 언제든 고칠 수 있으며, 나에게 길들여질 도구를 만들고 있다. 특별히 세상에 없던 도구를 발명해내는 것은 아니다. 내가 아는 만큼의 물리적 지식과 내 키와 팔 길이에 맞는 정도의 크기로 도구를 만들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의 지식과 신체성을 반영한 도구가 된다. 그 한계에서 기인한 기능적 비효율성, 형태적 과장됨이 오히려 형식을 조명하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결과물
지난 몇년간, 만들어진 형식들로 결과물을 낼 때 결과물 위에 얹히는 내용의 중요성을 여실히 깨달았다. 결과물 표면에 보이는 내용은 작업의 성격을 결론 짓거나 표면 뒤의 과정을 ‘과정’으로 분리해 버리는 힘이 있는 것 같았다. 창작에 있어서 형식과 내용은 개별 층위이겠지만, 나에게는 늘 인과로 작용한다. 때문에 형식과 내용을 분리하지 않으려는 시도로, 결과물의 내용은 최대한 배제하거나 최소화하여 과정이 온전히 표면에 얹히는 방법에 대한 탐구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결국 인간적인 무작위성이 드러나야 한다고 믿는다. 인간적인 무작위성이란, 자율적인 조형성이 아니라, 확고한 형식과 기준 아래 그것을 성실히 이행하는 과정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빚어지는 미세한 실수와 같은 것이다. 그러한 것들이 밀도를 높일 때 결과물 뒤에 보이지 않던 시간과 과정이 슬쩍 드러나는 순간이 만들어 진다고 믿는다.

‘그래픽을 공예하는 아주 사적인 방법론’이라는 주제하에 2016년부터 글자를 쓰는 도구, 종이를 만드는 도구, 혹은 스스로 도구화하여 오랜 시간 손바느질을 하는 형식들을 이용하여, 최근까지 비약적인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는 한 장의 평면 결과물을 만드는데 집중하였다. 현재는 평면에서 이탈하여 조형으로 넘어가는 탐구에 집중하여, 100줄의 실을 합사하는 스핀들 도구를 만들어 두꺼운 실로 이루어진 조형적 결과물을 얻어내는 데 주력하고 있다.


OFFICIAL
APP